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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커크 죽음과 한국 정치

by 새벽별419 2025.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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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정치, 극단의 언어가 불러온 비극

 

찰리 커크의 죽음은 미국 사회가 직면한 아이러니한 비극을 보여준다. 그는 총기 자유의 상징처럼 행동하며, 총기 사망조차 감수할 만한 대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그 자신이 총기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 우익단체 창립자 찰리 커크의 지난 1월 연설 모습 ⓒ AFP/연합뉴스

그의 언행은 언제나 극단적이었다. 좌파를 "미국을 파괴하려는 세력"으로 낙인찍고, 총기·코로나·이민 문제에서도 혐오와 분열의 언어를 앞세웠다. "총기 사망도 자유의 대가다", "이민자들은 미국을 파괴한다",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이다", "흑인 사회의 문제는 그들 자신 때문이다." 이러한 발언들은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사회적 갈등과 증오를 더 깊게 만들었다. 결국 극단적 언어는 극단적 폭력을 낳고, 정치적 폭력은 모두에게 불행을 안긴다.

하지만 아무리 언행이 과격하고 위험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대응이 총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폭력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이 "정치적 폭력은 모두에게 위협"이라고 경고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비단 이러한 비극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치 역시 혐오와 분열의 언어에 깊이 잠식돼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다. 그는 정치적 라이벌을 조롱하고 특정 집단을 적대시하는 발언으로 주목을 끌어왔다. "2030 여성은 피해망상에 빠져 있다", 위안부 피해자를 '이해당사자'로 축소하는 발언, 노인을 향한 혐오성 발언과 무임승차·경마장 논란,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두고 "볼모", "인질"이라 부른 것 등이 대표적이다. 지지층 결집을 위해 혐오와 분열을 자극한 방식은 찰리 커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의힘 또한 예외가 아니다.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 조장, 헌법을 부정하는 극우적 발언, 내란을 옹호하는 망언 등 극단적 언행은 끊이지 않았다. 최근 정청래 대표의 발언을 두고 송언석 원내대표가 "제발 그리 됐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한 사건, 그리고 이를 두둔하는 당의 태도는 혐오와 폭력이 어떻게 정치의 언어로 자리잡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치는 본래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혐오와 적대의 언어가 일상화되면 갈등은 조정되지 못한 채 파국으로 치닫는다. 찰리 커크의 언행은 지지층 결집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사회를 분열시키고 결국 자신조차 극단의 희생자가 되게 했다. 언어의 책임을 소홀히 한 대가였다.
혐오와 분열은 단기적으로 정치적 이익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쌓이면 사회는 깊은 균열을 안게 되고, 그 대가는 결국 모두가 치른다. 미국 사회가 그랬듯, 한국 사회 역시 혐오의 언어가 불러올 파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 지도자와 정당은 언어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더욱 언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극단과 혐오로 표를 얻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그 끝은 사회 전체의 파괴다. 지금 우리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상대를 '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혐오와 분열의 언어가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혐오가 정치의 무기가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파괴한다. 한국 정치권이 지금 당장 새겨야 할 경고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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