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의 정치화’와 ‘정치의 사법화’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울산지법 송승용 단독판사는 지난 2일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촛불사건 배당과 영장에 대한 법원 상층부의 개입을 “사법부를 흔드는 손”이라고 불렀다. 시장을 배회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사실상 잘 들여다보면 분명 실체가 있는 손이듯이, 사법부를 흔드는 손 또한 기어이 자신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 헌법 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우리 역사에서 이 문구가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법은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지만, 과거 독재정권 시절의 법은 권력의 안녕을 위해 기능했다. 정치적인 의도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사법의 정치화”현상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사법부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권력으로부터 조금씩 자율성을 획득하기 시작하면서 민감한 사회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판결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5.18 특별법사건과 교원노조사건, 각종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판결을 내려왔지만, 영화검열 위헌결정, 동성동본금혼 위헌결정 등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늘어났다.
사법부가 어느 정도 ‘중립성’과 ‘공정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보이자, 이번에는 “정치의 사법화” 경향이 나타났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사건에 대한 최종 판단이 헌법재판소에게 맡겨지고, 같은 해 행정수도이전 계획이 ‘관습법’까지 들고 나온 헌재에 의해 위헌판결이 내려지면서 사법부가 정치를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보수세력만 사회적 갈등 해결을 사법부에 맡겼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촛불시위 와중에서도 통합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자유선진당과 진보신당은 미국산 쇠고기와 관련된 2건의 헌법소원을 제출하기도 했고, 민변에서는 9만 6,072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청구인 명의로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다. 국민의 의사보다 극소수 사법 엘리트의 판단이 더 큰 영향력을 갖는 민주주의의 한계 때문이다.
이처럼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적인 과정으로 결정되어야 할 많은 정치적 사안들이 토론과 합의, 경쟁의 과정을 뛰어 넘어 점차 법복을 입은 사법 엘리트의 판결에 따라 희비가 갈리게 되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또 하나의 민주주의 위기 징후임이 분명했다. 더구나 국민으로부터 직접 선출된 대통령이 국민이 뽑지 않은 헌법재판소 판관들의 입에 따라 정치적 생명이 끝날 수도 있음을 과시한 것은 사법의 지배 아래 들어간 정치의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번 이메일 사건이 단순한 해프닝이 될 수 없는 것은 이런 “정치의 사법화” 추세에 “사법의 정치화”가 다시 결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법에 의한 지배(rule of law)’를 근간으로 하는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적 경향을 강화하는 것으로 법관의 ‘헌법해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실질적 법치주의를 의미한다. 한 나라의 민주적 내용을 헌법으로 응축시키고 이에 따라 모든 통치·정치 행위를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헌법해석권을 독점한 법관이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게 된다는 것은 곧 법이 갈등의 중재수단이 아니라 저항에 대한 억압수단으로, 권력의 방패막이로 전락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경우, 공식적인 제도를 통해 중재되지 못한 저항은 아예 숨죽이거나, 아니면 더욱 폭발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사법부, 과연 공정한 중재자였나?
그렇다면 지금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단지 판사 1~2명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이번 이메일 파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사법부가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사법부는 이전에도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판사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월간중앙이 2007년 3월 9일부터 13일까지 최근 5년 이내에 개업한 판사 출신 변호사 54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메일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직 판사들의 53.7퍼센트는 ‘불성실한 재판 진행(22.2퍼센트)’, ‘금품·향응 등 법조비리(19.4퍼센트)’, ‘불공정한 재판진행(18.1퍼센트)’, ‘사회적 약자 보호 미흡(11.1퍼센트)’ 등의 이유로 국민이 사법부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3명 중 1명꼴로 판사 시절 재판담당 변호인과의 친소관계가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친 편이었다고 응답했고, 5명 중 1명꼴로 사회ㆍ경제 권력의 압력으로 재판에 영향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58.5퍼센트의 전직판사들은 판결에 영향을 미칠 만한 유혹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고, 80퍼센트가 여론이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월간중앙, 2007.04.24).
위 조사결과는 사법 권력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할 공정성이 판사 개인의 성향에 따라 크게 흔들릴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헌법해석을 독점하고 있는 헌법재판소의 인적구성이 서로 비슷한 대학을 나와 비슷한 경험을 거쳐 비슷한 경제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보수적 남성들로만 채워져 있는 현실은 매우 다양하고 첨예한 사회적 갈등이 이들에 의해 공정하게 중재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사법 개혁, 어디로 가야 할까?
이번 이메일 파문이 사법부가 가진 문제점의 단면을 드러낸 것뿐이라면, 이 사건을 기회삼아 사법개혁의 문제를 다시 한 번 공론화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방향이 실질적 법치주의와 반대되는 형식적 법치주의, 즉 헌법재판소의 법률해석을 금지하고 헌법충성보다 정치를 더욱 강조하는 의회주의를 향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경우처럼 국회가 국민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뿐더러 정당정치의 미성숙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가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는 국가에서는 오히려 권력이 최소한의 헌법적 안정장치를 무시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이것 역시 우리 역사에서 지겹도록 경험해온 바다. 지난 시기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허울뿐인 헌법을 다시 유일한 근본 규범으로 올려놓는 것이었다. 대단히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부족한 헌법 규범으로나마 통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소수의 사법엘리트들에게 맡기거나, 아니면 도저히 신뢰하기 어려운 의회권력에게 맡기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새로운 사법체계를 고민한다면 형식적 법치주의와 실질적 법치주의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데 머물기보다 사법체계의 근본적 작동원리를 바꿔야 한다. 그것은 헌법을 제정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인 국민의 주권을 사법체계 안으로도 투입하는 방향이다.
즉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사법 엘리트주의를 창출하는 헌정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고착화 하는 의회주의의 한계를 모두 벗어날 수 있는 민주적인 사법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법은 정치화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사회화되고, 보다 국민(people)화 되어야 한다.
민주적 사법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국민의사가 국가운영과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사법엘리트에게 국가차원의 모든 문제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사법체제 전반에 걸친 국민의 민주적 통제를 구현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우선이다. 또한 재판과정뿐만 아니라 사법부 전반의 구성과 운영에도 국민의 목소리가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의제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을 갖는 헌재의 권한을 국민에게 되돌려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국가차원의 중대한 문제는 헌재가 아니라 국민에게 직접적인 의사를 묻는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영향을 미치며, 결정 결과에 따라 중대한 변화가 예상되는 사안을 소수의 사법 전문가에만 맡겨 놓는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다. 이것의 구체적 형태는 국민 스스로도 제안 가능한 아래로부터의 국민투표(referendum)를 도입하는 것이다.
국민투표와 같은 직접민주적 제도들이 단순한 선호만을 수렴하는 한계가 있다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일종의 대규모 국민배심원을 구성하여 심의(deliberation)를 보장하는 것으로 대신해볼 수 있다. 대표자가 아니라 국민의 ‘대리자’들이 사법 엘리트 대신 심도 깊은 논의를 통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배심원의 규모와 선출방식은 국민 전체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로 조정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배심원에서의 결정방식은 일반 배심제처럼 만장일치를 유도하지 못하더라도, 2/3나 4/5의 초다수(super majority)를 기준으로 함으로써 심도 깊은 토론을 통해 최대한 합의를 도출하도록 유도해볼 수 있다. 만일 충분한 토론을 통해서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국민투표에 부쳐 국민 모두가 함께 결정하는 대안을 마련해 놓을 수도 있다.
사법적 결정에 국민이 참여해야 하는 것은 헌법재판만이 아니다. 미국 등 여러 선진국에서는 이미 주권자인 국민을 재판에 참여시켜 일반상식과 경험 및 지식을 기초로 피고인의 유ㆍ무죄를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도 2008년 1월 1일부터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배심제를 부분 도입하고 있는데, 만 20세 이상 국민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된 배심원들이 재판에 참여해 유ㆍ무죄 평결을 내리고 적정 형량의 범위를 산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국민참여재판제는 아직까지 형사사건에 제한된 재판에서만 이뤄지고 있으며, 피의자가 공소 사실을 자백하여 비교적 유죄평결을 내리기 쉬운 사건에 적용되고 있다. 또한 배심원의 유ㆍ무죄 평결을 판사가 무조건 따라야 하는 미국 배심제와 달리 국민참여재판에서는 판사가 배심원의 평결을 참고만 할 뿐 독자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제도가 자리 잡게 된다면 판사는 양형만 하고 실질적인 결정권을 배심원들에게 부여하는 방안으로의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사법부의 개혁과제는 판결방식으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지난 2005년 9월 ‘민주적 사법개혁실현을 위한 국민연대’는 배심제 도입을 비롯해 다양한 개혁과제를 담은 <민주적 사법개혁 국민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법관의 기수별 서열 승진제도 폐지, 법원행정처의 기능 축소, 법관 인사에 대한 국민참여 확대,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 법조인에 대한 징계제도 강화, 군 사법개혁, 법관수ㆍ변호사수 대폭 확대 등 진취적인 제안들이 들어 있다. 이런 다양한 논의와 대안들은 이번 이메일 파문을 계기 삼아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사법부를 민주화하는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법치의 대상은 바로 정권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지난해 촛불시위 이후 ‘법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한마디로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은 법의 테두리에서만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법치주의의 원래 개념은 권력자가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준칙, 곧 법에 따라 지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치’의 적용대상은 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이 아니라 권력 그 자신이며, 법치는 통치자가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오직 법에 근거해 통치하도록 일정한 제약을 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이메일 파문은 권력자가 법을 자신의 반대자를 억누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법치를 통치수단이나 처벌과 억압의 용도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것이 민주주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사회적 갈등을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공정한 룰로 중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사법권을 이의제기할 수 없는 ‘권위’로만 해석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 법의 역할은 국민의 의사가 민주적으로 개진되고 결정과정에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하도록 보장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민주적 법치의 구현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가야할 과제다.
물론 이명박 정부 하에서 정치화된 사법부가 스스로 이런 개혁을 이뤄낼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명박 이후’를 위해서라도 현실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없다면 이메일 파문에 대한 비판 또한, 한 순간 짜증의 배설에 지나지 않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손우정 sonwj@saesay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