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제위기와 정책대응
위기와 변화
1월 수출이 30퍼센트 이상 하락하고 IMF가 마이너스 4퍼센트의 성장률을 전망하는 등 경제지표가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 금융시장에서 촉발된 위기가 실물로 전이되더니, 실물부문의 지표 악화는 또 다시 금융시장을 강타하는 악순환이 가속화되고 있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경제는 그 어떤 나라보다 위기에 취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GDP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실물부문의 대외 의존도는 차치하더라도, 자본시장에서 환율을 비롯한 거시금융 변수의 변동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경제의 몰락은 지난 30여 년간 브레이크 없이 질주해 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실질임금이 정체되고 소득양극화가 확대되고 경제적 불안정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와 대중의 현실 인식에 대한 변화는 새로운 정치적 변화를 위한 환경을 구축하기 마련이다. 미국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부자들의 클럽이라고 알려진 다보스 포럼에서 미국식 자본주의를 통렬히 비판한 것도 이러한 정치적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1930년대와 40년대,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은 경제학에서 케인즈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비해 70년대 통화주의와 신고전파 경제학은 오일 쇼크로 초래된 경제적 위기를 이용하여 반혁명의 깃발을 올렸다.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경제적 위기를 활용한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로 알려진 밀턴 프리드먼이었다.
“민간, 특히 정부 정책에는 엄청난 관성(현상유지의 횡포; a tyranny of status quo)이 존재한다. 단지 위기만이 실질적 변화를 초래한다. 그러한 위기가 발생할 때, [새로이] 실시되는 정책은 잠재된 사상[이론]에 달려있다.”
그는 또한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정치적으로 불가피할 때까지, 기존의 정책에 대한 대안을 개발하고, 생생하고 쓸모 있게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프리드먼이 살아 있었다면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지난 9월, 재무부의 7,000억 달러 구제금융에 반대하는 서한을 의회에 보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166명의 경제학자들이 구제금융에 반대하는 서한에 서명했다. 95년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인 루카스(Lucas)는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상황이 긴박해질 수 있지만, 지금 당장 긴박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은 금융 부문의 문제”라고 일축하였다. 위기의 심각성을 인지조차 못한 것은,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성경처럼 숭배하는 시장에서는 위기가 발생할 까닭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2.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 : 생산성과 임금의 상관관계 붕괴
주류경제학에서 경제위기는 확률적으로 매운 드문 현상인 ‘Perfect Storm’으로 비유되곤 한다. 즉 개별적으로 발생한 기후 변화는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만, 동시에 연속적으로 발생할 경우 ‘폭풍’처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80년대 경제적 패러다임이 변화한 이후 브레이크 없이 질주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하여 미국경제의 수많은 구조적 모순은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다고 수차례 경고해 왔다. 즉 지금의 경제위기는 예측할 수 없는 아주 드문 확률적 사건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필연적 결과다. 그리고 그 패러다임이 현실에서는 분명 사망 선고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갈 데까지 가 볼 작정인지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말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임금과 생산성 증가 사이의 연관 고리가 깨졌다는 점이다.
[그림1]은 미국 노동력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관리직에 종사하지 않는 노동자의 노동생산성과 보상(임금과 사회적 편익)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두 지표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였으나, 80년대 이후 생산성은 증가하지만 임금은 정체되는 국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일한 내용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그림2]는 노동생산성과 중간가구의 소득과의 관계 또한 80년대 이후 깨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상관관계의 붕괴는 소득 격차의 확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생산성은 지속적으로 상승함에도 중-하위 소득계층의 임금이 정체되면, 필연적으로 소득은 고소득 계층에 집중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림3]은 상위5퍼센트와 하위20퍼센트의 소득 변화를 나타내는데, 70년대까지만 해도 두 계층의 소득 변화 추세는 비슷했으나, 80년대 이후 뚜렷하게 추세가 이탈되어 양극화가 확대되었다.
신자유주의 패러다임 : 극심한 양극화
좀 더 먼 과거로 돌아가면 경제적 위기가 왜 발생했는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림4]는 세금을 지불하기 전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상위10퍼센트 가구(2006년 기준, 10만 6,400달러 이상)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1917년부터 2006년까지 장기 시계열로 나타낸 것이다.
장기 시계열의 경우 뚜렷하게 U자형으로 나타나는데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인 1928년에 상위 10퍼센트는 전체 소득의 절반인 49.3퍼센트를 차지하였다. 미국의 뉴딜정책과 세계대전 이후 1944년에 32.5퍼센트까지 줄어든 이후 1970년대까지 35퍼센트 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상황은 극적으로 변하였다. 위기가 발생하기 직전인 2006년에는 49.66퍼센트로 오히려 대공황 직전보다 높은 수치로 돌아간 것이다. 상위 10퍼센트의 소득을 더욱 세분하면, 상위 1퍼센트(38만 2,600달러 이상)는 1928년 상위 10퍼센트 소득의 48.5퍼센트(전체 소득의 23.9퍼센트)를 차지하였다. 누진세 등 각종 사회보장 정책의 도입으로 1970년대 9퍼센트까지 하락했지만, 2006년 22.9퍼센트로 대공황 직전으로 회귀하였다. 위의 [그림5]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상위 1퍼센트 소득의 급격한 증가가 양극화 확대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상위10퍼센트가 전체 소득의 절반을 차지하고, 상위1퍼센트가 그 소득의 절반을 차지하는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추세는 부유층 감세를 핵심으로 하는 부시 정권 기간에도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경기 확장기인 2002~6년, 연평균 실질소득 증가율은 2.8퍼센트였다. 상위 1퍼센트는 평균의 3.5배가 넘는 연평균 11퍼센트나 증가했지만, 하위99퍼센트는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0.9퍼센트 증가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다시 대공황에 버금가는 위기가 터졌다. 20대 80에서 10대 90, 그리고 급기야 1대 99의 사회로 돌진하다 미국경제는 몰락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경제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양극화가 확대되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것이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상위 20퍼센트의 소비성향(소비지출/가처분소득)은 64.7퍼센트인데 비해, 하위20퍼센트는 157.6퍼센트에 이른다. 주류경제학에서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고 하지만, 인간이 실생활에서 필요한 지출은 유한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먹는데 한계가 있는 것처럼 개인적 필요지출에도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위 20퍼센트는 전체 소득의 35퍼센트 이상을 저축한 데 비해, 하위 20퍼센트는 소득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입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처럼 과잉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저소득층의 차입형 소비지출이 한계에 봉착하자 내부에서부터 붕괴한 것이다.
이러한 양극화 추세는 한국의 경우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할 경우 90년대 초반 상위 20퍼센트와 하위 20퍼센트 가계의 소득 격차는 4배 정도였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소득격차는 급격히 확대되어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2인 이상 도시가구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1인 및 농가가구를 포함할 경우 소득격차는 무려 7.28배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소득격차의 확대는 대공황 이후 사회보장을 핵심으로 한 뉴딜체제가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은 ‘시장효율성’을 무기로, 임금 및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한 각종 누진세, 사회보장제도,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의 권리 강화 등 제도적 기반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렸다.
3.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데올로기
신자유주의 정책 Box
통상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을 ‘신자유주의’라고 하는데, FTA-규제완화-감세-민영화로 요약할 수 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세계화’, ‘노동시장 유연화’, ‘인플레이션 목표제’, ‘작은 정부’로 정의할 수 있다.
위의 [그림6]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식적으로 나타낸 것인데, 박스의 한 가운데에 노동자가 놓여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모든 피해와 고통이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집중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농민과 자영업자의 피해 또한 노동자 못지않게 크게 나타나고 있다.
세계화란 자유무역, 자본자유화, 다국적기업, 글로벌 아웃소싱과 관련된 것으로 개발도상국에는 워싱턴-컨센서스와 미국식 FTA 추진으로 나타나고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자본수지에 대한 자본통제를 폐지하고, 국내 금융시장의 규제완화를 촉진하는 ‘금융화’ 정책과 연계되어 있다. 미국식 FTA는 다국적 기업과 글로벌 아웃소싱의 이익을 극대화 할 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작은 정부’는 정부 재정지출의 정당성에 대한 공격으로, 재정수입 원천을 축소할 목적으로 민영화와 감세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금융부문의 규제완화 또한 정부규제의 비효율성을 부각시키며 급속도로 추진되고 있다. 또한 연기금, 건강보험을 비롯한 사회보장제도를 민영화시키고,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각종 간접투자 상품에 세제 및 규제상의 이득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정책 추진 결과 가계에 ‘투자자 정체성’을 각인시켜, 노동계급 내부의 단결을 저해하고 금융기관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이 무차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비정규직을 대량적으로 양산시켜 노조를 내부로부터 분열, 약화시키고, 최소임금, 실업수당, 노동자의 권리 보호 등 각종 제도적 기반을 침식시키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거시경제정책에서는 완전고용정책을 포기하고 물가안정목표제를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 물가가 상승할 경우,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에 모든 이데올로기 공세를 펴는 것도 이러한 정책 추진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정부의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거시경제를 관리하는 능력은 현저히 약화되고, 많은 기능들이 대기업이나 금융시장에 ‘아웃소싱’ 되고 있다. 이는 ‘민영화’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재벌에게 알토란같은 독점기업을 재벌에게 넘겨주거나 정부가 담당했던 사회보장기능을 축소하고 금융시장에 이양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갈브레이스(Galbraith)는 정부의 이러한 행태를 빗대어 ’약탈국가(predator state)’로 정의하기도 하였다. 정부의 든든한 지원을 배경으로 대기업과 금융기관은 갈수록 부유해지고, 공적자금이 투입되었지만 사적으로 생산된 서비스를 제공받는 노동자들은 더욱 더 적대적인 환경에 노출된 상황을 일컫는다.
이러한 모든 정책 조합들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리를 침해하여 실질임금의 지속적 정체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요인이 결합되어, 생산성은 꾸준히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은 정체되고, 양극화는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4. 신자유주의 정책 폐기와 대안적 경제정책
새로운 경제정책 패러다임
신자유주의 정책은 단지 정부의 거시경제정책 변화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국민경제의 작동 방식과 그것을 지배하는 제도 측면에서, 금융시장과 금융기관들의 지배력이 갈수록 확대되는 금융화 현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자본시장이 주식시장과 경영자시장을 통해 기업을 통제하고, 기업은 자본시장과 최고경영자의 이익에 복무하는 동맹관계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금융화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기초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국민경제와 대중의 이익과 부합하도록 금융시장과 기업의 행위를 바꾸는 지난한 제도적 개혁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박스를 해체하는 개혁의 대략적인 방향을 도식적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화에 대해서 언급하면, 한미FTA와 같이 다국적기업과 투자자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무차별적인 개방정책은 재고되어야 한다. 오히려 남북경협과 동북아 시장을 확대하면서 지역 내 자유시장과 통화동맹 구축에 힘써야 한다. 특히 고용과 국내 제조업 기반을 악화시키지 않는 선택적 세계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또한 극심한 환율 변동성이 금융시장 불안정성의 주요 요인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외국인의 포트폴리오 투자 비중이 자본시장 규모에 비해 너무 높고, 지나치게 자유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트폴리오 투자에 대해서 일정 기간 중앙은행에 준비금을 예치하는 외환가변유치제를 도입하는 등 자본시장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여 자본수지의 불균형과 불안정성을 완화시켜야 한다.
둘째, 정부는 시장의 조정자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공공재, 건강보험, 사회보장, 교육, 사회 인프라는 정부가 공급하는 것이 민간보다 훨씬 효율적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IMF 이후 사실상 실종된 산업정책을 노동-친화적으로 부활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최종고용자’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세제정책에 대해서 말하면, 단기적으로 적자재정이 발생하더라도 사회복지정책을 확대하면서 점진적으로 증세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증세의 순서 또한 사회적 정의와 재분배적 기능을 고려하여, 재산세, 법인세, 소득세의 순서로 순차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셋째, 중앙은행은 물가안정목표제에서 벗어나 완전고용을 정책 우선순위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또한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치유하기 위해 한국은행에 금융기관 감독권을 부여하는 등 금융안정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은행의 권한이 확대되는 것에 비례하여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또한 마련해야 한다. 금융정책을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에 노동조합과 소비자 대표가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장기적으로는, 지방 행정이나 교육기관의 직선제처럼, 지역 한국은행 총재를 민간이 직접 선출하고 이들이 한국은행 총재를 선출하는 민주적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넷째, 극단적인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은 폐기되어야 한다.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은 기업의 단기주의 행태에 비추어 필연적으로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할 수밖에 없다. 또한 노동생산성 증가에 따라 실질임금이 체계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정부는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 노동조합 가입에 대한 세제 혜택 등 노조 조직률을 높이는 정책 또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기업 지배구조에 대해서 언급하면, 경영자의 성과급을 제한하고 무분별한 금융시장 진출 또한 제한해야 한다. 또한 기업이 자본시장의 이익에만 복무하지 않도록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연기금의 사회적 책임투자를 강화하는 등 사회적 성격을 발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주주자본주의 모형에서 이해관계자 모형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할 경우, 해외투기자본의 공격에 대비하여 재벌의 경영권 보장 장치를 마련하는 대가로, 투자확대, 노동권 보호, 경영 참여를 보장하는 사회적 빅딜 또한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금융시장은 투기를 억제하고 규제와 감독, 투명성을 강화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 또한 자산시장의 버블을 억제하고 경기순응적인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완화하기 위해 자산에 기초한 지급준비금 제도(asset-based reserve requirement)를 실시해야 한다. 현재 부채와 리스크에 대비하여 일정한 비율의 자본금을 준비하는 체제에서 금융시장은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변동성이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금융기관에 대해서 자산의 규모가 확대되는 만큼 중앙은행에 일정 비율을 지급준비금으로 예치시키는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실패와 진보적인 사회정치적 컨센서스
지난해 10월23일, 미국의 중앙은행 총재였던 그린스펀 의장은 의회에 출석해 자신의 경제이데올로기에 결함이 있었으며 금융기관의 이기적 행위가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고 고백하였다.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실패했음을 증언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 IMF, 세계은행 그 어떤 권위 있는 공적 기관도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조기경보체제를 발동할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일례로 2007년 3월 버냉키 의장은 양원 합동경제위원회에 출석하여 “서브프라임 시장에서 발생한 문제가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흡수될 수 있다”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금융위기가 심각하게 전이되고 있음에도 IMF와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긴축정책을 추진할 것을 권고하였다. 한국은행 또한 지난 8월 초 금리인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금리를 인상했다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금리를 대폭적으로 내리는 실책을 범하였다. 물가안정이라는 협소한 정책 우선순위에 기인한 것이지만, 유가의 투기적 요인을 간과하여 상품투기시장과 유가의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비용인상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정책 처방 또한 부재했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유수의 경제연구소 또한, 작년 경제전망치를 5퍼센트 정도로 현실(2.5퍼센트)보다 두 배나 높게 설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올해 터무니없는 경제전망치 제시 또한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서브프라임 부실의 미국 실물경제 파급 및 국내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거나 경기침체가 조기에 종료될 것이라며 사태의 심각성을 오판하는 우를 범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부채 확대, 실질임금 정체, 소득 양극화가 어떻게 관련되는지, 국내 금융시장에서 자본수지의 변동성이 실물경제에 어떻게 파급되는지를 이해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와 정책 처방은 위기 국면에서 각종 오류와 실책을 남발하고 있다. 이에 비해 포스트 케인즈학파를 비롯한 좌파 경제학자들은 끊임없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지속불가능성, 불안정성, 불공평성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따라서 단기적인 경제침체 극복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만,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 새롭고 진보적인 사회정치적 컨센서스를 구축하고 이를 정치 무대의 중심 의제로 설정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처럼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정치적으로 불가피할 때가지”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국민경제의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여경훈 khyeo@saesay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