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16. 17:15ㆍ리뷰/책
알제리 독립을 위해 열심히 투쟁했던 혁명가이자 쪼개진 아프리카를 통일 하고자 했던 사상가.
프란츠 파농이란 사람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단순한 알제리 혁명가 정도였다. 처음 한겨레 신문의 책소개에 이 사람에 대해 나왔을때 한 번 읽어 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왜냐면 아제리란 나라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알제리 하면 곧 프랑스가 떠올랐다. 그것은 어찌 보면 알제리란 어면한 국가에 대한 모독이다. 왜냐면 알제리란 나라는 잘 모르고 오로지 프랑스의 식만지였기때문에 그저 프랑스와 연결된 알제리란 단어 하나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 세계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지극히 제국주의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식민지를 통해 지금의 부를 획득한 서구 열강의 위주의 세계사를 공부하고 있으니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세계사가 아닌 유럽사가 맞겠다.
아무튼 그런 교육에 나역시 자유롭지 못한 탓일까. 알제리 하니 홍세화 씨가 파리 망명 시절에 쓴저서들(나는 파리의 택시기사. 세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가르고)에서 알제리와 프랑스와의 관계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알제리란 나라가 대단히 궁금했었다. 더욱이 프란츠 파농이 그곳의 혁명가라고 하니 말이지.. 똘레랑스를 중요시 여기며 민주주의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사상에 대해 존중할줄 아는 프랑스라 하더라도 식민지 제국주의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별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듯히 생각하고 있는 모습.. 그래서 일까 더욱 궁굼했었다.
어쨌든 책을 읽으면서 프란츠 파농이란 인물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어딘가 체 게바라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가 의사라서? 그건 아니었다. 노먼 베쑨도 의사이자 혁명가 였지만 이미지가 조금은 달랐다. 물론 모든 혁명가들의 공통점은 인간애였다. 사람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가슴으로 느끼고 아파한 것이다. 파농 역시 모든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 하였다. 난 어찌 보면 그것이 바로 프란츠 파농이 정신의학 박사를 취득하게된 계기라고 생각 되어진다. 여기서 노먼베쑨과 차이가 있는듯 하다.
노예제를 폐지한 프랑스 정치인의 무덤에 가면서 파농은 어린 나이에 왜 이 무덤에서 그를 경배해야 하는지 생각하게끔 한다. 그 이전의 사회. 자신과 같은 흑인에게 억압받는 사회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에 대해서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왜곡들이 있음알 알게되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한다.
사람에 대한 파농의 사랑은 어쩌면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의사가 되어서도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방법이 기존의 방식과 는 달랐기에 의사들과 간호사들과 많은 다툼이 있었지만, 자신이 생각했을때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했을땐 타협의 여기자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정신과 의사도 결국엔 환자의 질병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무제라는 걸 깨닫고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해선 사회 환경적인 질병을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먹은대로 실천을 하는 사람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백인들끼리 서로 싸워 죽이는 일에 끼어 들지 말라는 주변에 말에 이렇게 이야기 한다. "백인과 흑인의 문제가 아니라 억압과 피억압,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로 바라보면 나치의 억압 앞에 놓일 사람들을 생각하면 전쟁터로 달려 나가야 한다." 물론 그 전쟁이 인류를 위한 전쟁이 나리라는 걸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피억압 민중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대단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36살이라는 짧은 생애동안 파농의 행동을 보면서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혁명활동을 하면서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는 모습. 나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다짐하면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는데 급급한건 아닌지. 내 스스로가 사고하고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