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세계적 경제위기가 보여주듯 국제 금융체제는 두 가지 특징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는 일국의 통화, 즉 미국의 달러에 기초한 글로벌 기축통화 체제의 본질적 불안정성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는 특정 국가나 지역의 통화에 기초한 어떠한 글로벌 기축통화체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불안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금융시장 작동에 본질적인, 특히 최근의 탈규제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는 체제의 경기순응성이다. 이는 금융시장의 다양한 부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차입자로 간주되는 경제주체는 자금조달의 비용과 이용가능성(공급) 측면에서 경기가 침체할 경우 비용은 상승하고 조달은 곤란해진다. 특히 개발도상국은 외부의 금융시장 충격이 발생할 경우 자금조달 기능에 심각한 경기 순응적 충격을 받게 된다. 따라서 각국 정부의 경기안정 거시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정책 공간 또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들 국가들은 이러한 국제금융체제의 취약성에 대비하여 최근, 대량의 외환준비금을 축적하는 형태로, ‘자기보험(self-insurance)’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개별국가 입장에서는 외환위기에 대비하여 제대로 된 집단보험이나 거시경제적 정책협조의 메커니즘이 부족한 국제금융체제에 대한 합리적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글로벌 금융체제의 불안정과 불공평에 대비한 자기보험 정책은 글로벌 불균형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는 ‘구성의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위험 또한 드러내고 있다. 최근 국제무역과 금융 시장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반응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최근 국제 기축통화와 금융체제에서 불안정성과 불공평성의 조합이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우선 달러체제 자체가 지닌 내재적 불안정성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달러체제에 내재한 발권력과 부의 효과의 비대칭성, 즉 불공평성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1. 글로벌 불균형과 불안정
최근 국제경제의 특징적 양상은 ‘글로벌 불균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적인 양상들을 포함한다.
첫째, 미국의 지속적이면서도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경상수지 적자다. 이와 상응하여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 일본과 독일, 그리고 석유수출국의 지속적인 흑자 규모 확대다.
둘째, 미국의 대외 순 부채 포지션의 확대와 이에 상응하여 발생하는 개발도상국 중앙은행의 자산 구성에서 달러 표시 금융자산의 대규모 축적이다. 셋째, 민간과 정부할 것 없이 전자의 높은 지출과 낮은 저축률, 그리고 후자의 높은 저축률, 달러에 고정시킨 환율제 도입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는 ‘세계의 성장 엔진’으로 불리는 미국의 국내 지출, 특히 소비지출의 자금조달에 사용되어 ‘불안한 글로벌 균형’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불균형은 달러의 주기적인 평가절하,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남미와 동아시아 금융위기 등에서 보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물론 점차 그 규모도 확대되고 있다. 결국 불균형은 현재의 국제기축통화 체제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 체제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국제 지불 수단과 각국 중앙은행의 지급준비금으로서 미국의 달러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70년대 초반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미국은 달러와 금의 태환을 불허하고 있지만 미국의 달러는 여전히 기축통화로 사용되고 있다. 결국 달러는 미국의 부채이자, 다른 국가의 지급준비금으로서 광범위하게 축적되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진 게 없다. 즉 달러-금 본위제에서 달러 본위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달러-금 본위제 하에서는 미국이 금이나 다른 국가의 통화를 보유하여 달러-금 태환의 국제적 규율을 받았다면 지금은 아무런 제약 없이 달러를 발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미국의 특권은 확대된 반면 취약한 시스템은 더 취약해졌다.
특정 국가의 통화에 기초한 국제 기축통화의 본질적 불안정성은 이미 1960년대 초반, Robert Triffin이 지적하였다(Ocampo, 2008: 75). 우선, 오늘날 글로벌 경제에서 달러 표시 자산을 창출하는 여러 방식이 존재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이 순 달러 자산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경상수지를 적자로 유지해야만 한다. 또한, 기축통화 국가인 미국의 경우는 자국 국채가 국제금융시장에서 ‘안전자산’으로 간주됨에 따라, 금리의 결정에 있어 환율 변동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통화정책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적자는 기축통화로서 달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따라서 달러를 다른 통화로 대체하려는 유인을 제거하기 위해, 즉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 회복을 위해 달러가치는 주기적으로 변동을 일으킨다. 결국 달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국 중앙은행이 달러를 비축할 수 있도록 미국의 대외적자가 필요한 반면, 기축통화의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미국의 대외 흑자 혹은 균형이 필요하다. 이를 통상 달러체제의 딜레마라 부르며, 주기적인 달러의 평가 절상과 회복 그리고 그에 수반한 불안정성 또한 이러한 체제의 내적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
이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화폐경제가 상품경제와 어떻게 다른지 부터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논지 전개의 편의를 위해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국가를 A, 그렇지 못한 국가를 B로 통칭한다.
국제통화가 매우 낮은 거래비용으로 기능하는 유동자산이라면 국제적 지불수단의 도입으로 쌍무적 거래를 다자적 거래로 확장시키는 체제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필요의 이중적 일치(double coincidence of wants)’가 화폐경제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됨에 따라, 이른바 효율성 이득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화폐의 도입은 국제통화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지만, 국제거래 불균형의 잠재적 원천이 될 수 있다. 케인즈가 지적한 것처럼, “국가들 사이에 국제수지 균형을 유지하는 문제는, 물물교환 방식이 화폐와 환어음의 사용으로 이행됨에 따라 결코 해결된 적이 없다”. 이러한 진단은 아래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여전히 유효한 진단이다.
현 국제금융체제의 기축통화는 달러다. 따라서 국제거래에서 상품에 대한 가격 표시(환산)와 지불은 대부분 달러로 이루어지고 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장-단기 다양한 유형의 차입-대출 계약에도 달러가 이용되고 있다. 화폐경제에서는 특정 경제주체의 입장에서 판매와 구매는 언제나 비동시적으로 발생하므로, 개별 경제주체는 거래와 예비적 목적으로 ‘유동’자산의 형태로 구매력의 준비금을 유지하고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무역과 금융, 경제의 모든 거래에서, B국의 수입과 수출, 대출과 차입은 비동시적으로 발생하므로 지급준비금을 축적해야 할 합리적 동인이 발생한다. 따라서 B국의 중앙은행은 ‘제도적으로’ 달러 표시 자산의 형태로 외환준비금을 비축할 유인이 발생한다.
이러한 유인 이외에 최근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독특한 유인이 확대되고 있다. 우선, 개발도상국에서는 성장률을 제고하기 위해 ‘가격경쟁력’을 근거로 환율의 평가절상을 피할 목적으로 달러를 비축할 인센티브를 지니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외환시장의 투기적 공격에 대비하고 금융시장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보험’정책의 일환으로 달러 비축을 확대할 인센티브가 커지고 있다. 이처럼 달러 비축의 인센티브가 확대됨에 따라 글로벌 불균형은 확대되고 금융위기가 발생할 경우 이러한 불균형은 불안정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다.
즉 금융위기는 지불 수단으로서 달러 비축의 필요성을 더욱 강화하고 달러표시 자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지만, A국의 대외 부채의 확대, 달러표시 자산의 가격 하락에 대한 의구심으로 달러의 변동성에 세계경제가 좌우되는 특징을 보인다. 만약 작년처럼 안전자산 선호 현상으로 달러가 평가 절상될 경우, 금융시장은 일시적으로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균형가치로 복귀할 힘과 시점을 늦춤에 따라 불균형의 지속을 더욱 확대시킬 수도 있다. 특히 금융시장에서 달러표시 자산에 대한 의구심이 동시에 확산될 경우 달러의 급격한 변동성을 유발하고 이는 금융시장과 실물시장에서 누적적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파괴적 현상으로 귀결될 수 있다.
다음으로, 국제경제에서는 화폐가 재화를 구입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B국이 A국의 통화를 비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B국의 통화는 국제거래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A국이 필요로 하는 재화를 생산하여 수출하는 방법뿐이다. 따라서 기축통화에 대한 세계적 수요는 단지 통화를 찍어냄으로써 B국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즉 발권력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재화는 체계적으로 B국에서 A국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특권으로 인해 A국은 자율적인 거시경제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데 비해 B국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A국의 자율적인 거시경제정책 변화는 달러의 변동성과 함께 세계무역의 주기적인 변동을 초래하며 80년대 초반이나 90년대 초반처럼 A국이 수축적 거시경제정책을 수행할 경우 세계경제는 동반침체를 경험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재화는 체계적으로 B국에서 A국으로 이동하는데, 발권력의 비대칭성은 이를 체계적으로 강화할 뿐이며 이에 역행하는 A국의 거시경제정책은 세계경제의 동반 침체를 수반하게 된다. 이는 거시경제에서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Boom-Bust 동학을 달러 기축통화의 문제점에서 파악한 것으로 사실상 동전의 이면과도 같은 현상이다.
2. 글로벌 기축통화의 본질적 비대칭성
세계 금융시장의 작동을 특징짓는 boom-bust 동학은 세계경제의 본질적 비대칭성에 기초한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융 부문에서 그러한 비대칭성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은 자신의 통화로 표시된 채권을 발행하는데 여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일부 서방국가의 논자들은 이를 원죄(original sin)라 부르고 있다.
둘째, 국가 간 자본시장의 발달 정도에 격차가 존재하며, 개발도상국들은 상대적으로 환율 변동성이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내 자본시장은 체계적으로 단기 자본조달이 확대되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셋째, 개발도상국의 국내 자본시장 규모가 작으므로, 잠재적으로 직면하는 투기적 공격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통화로 표시된 자산에 대한 해외수요는 환율 변동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환율의 평가절하가 예상될 때, 시세차익을 노린 해외수요 자체가 환율압박에 의해 붕괴될 수도 있다. 이는 97년 외환위기,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 금융시장에서 환율과 금융시장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설명하는 주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한편, 국제 기축통화의 본질적 불공평성은 부의 효과(valuation effect)의 비대칭성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국제적 불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A국은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를 통해 이중의 편익을 획득하고 있다. A국 통화의 평가절하는 자국 상품의 가격경쟁력 회복을 통해 무역수지의 개선을 초래할 수 있으며, ‘부의 효과’를 통해 순 대외 포지션을 개선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A국 통화의 평가절하는 A국이 보유한 해외 금융자산의 가치를 증가시키지만, A국의 대외부채는 기축통화국의 지위 덕에 자국의 통화로 표시되므로 명목가치가 변하지 않는다. 즉 자산의 가치는 증가하지만 부채의 가치는 불변이므로, 플러스 부의 효과라는 이득을 향유하게 된다.
이에 비해 B국은 자국의 통화가 평가절하 될 경우, 만약 대외 순부채국의 포지션에 있다면 상황은 심각해질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B국은 자신의 통화로 표시한 채권을 발행할 수 없기 때문에 B국의 대외부채는 전형적으로 A국의 통화로 표시한 외화 채권이다. 따라서 자국 통화에서 평가절하가 발생하면, 순부채국인 경우 대외부채의 가치는 증가하여 채무 부담은 더욱 가중된다. 즉 환율 조정 과정에서 A국과 달리 자국통화의 평가절하가 발생할 경우 마이너스 부의 효과로 불이익을 받는다. 더군다나 자국 통화로 표시된 채권을 발행할 수 없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발생할 경우 체계적으로 달러 수요가 늘어나고 환율은 더욱 절하되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자본수지 변동에 따른 경기 순응적 환율 변동(자본수지 흑자일 때 평가절상, 적자일 때 평가절하)은 부의 효과에서도 경기 순응적 성격을 보이게 된다. 또한 환율 변동의 민감성은 (투기적 요인과 결합하여) 단기로 자금을 조달하여 장기투자에 공급하는 만기 불일치 위험과 주식시장의 경기 순응적 성격 또한 강화시키게 된다. 개발도상국의 환율하락이 자본이득을 상쇄할 정도로 클 경우, 주식시장의 동시적 이탈을 초래하며, 이는 작년 환율-주가의 동시적 하락을 설명하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의 주식시장은 체계적으로 투기적 단기투자에 노출되어 변동성과 경기 순응성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국내 자금조달 또한 BIS자기자본비율 등의 요인으로 경기 순응적인 특징을 보인다면 금융위기가 발생할 경우 국내 금융기관의 차환 요구는 국제금융시장에서 부분적으로만 충족될 것이고, 이는 주기적인 유동성 위기에 노출될 잠재적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만약 국내 금융시장에서 금리가 환율 변동의 리스크를 완화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펼친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즉 환율의 평가절하가 주식과 채권시장에서 외국인의 동시적 이탈을 초래하고, 달러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97년 외환위기 때처럼 국내금리를 올린다면 국내 신용공급과 자산가격의 동반하락을 초래하게 된다. 이는 다시 투자와 소비 지출 하락을 초래하여 누적적 경기침체의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3. 글로벌 불안정성과 개발도상국의 보험 정책
결국, 개발도상국에서 거시경제가 불안정하게 작동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자본수지 변동성이며, 자국 통화로 표시한 채권을 국제시장에서 발행할 수 없는 원죄(?)로 인해 위기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97년 외환위기를 전환점으로 개발도상국들은 자본수지 변동성이 초래하는 국내 거시경제 불안정성의 교훈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게 되었다.
또한 워싱턴 컨센서스에 기초한 IMF의 정책처방이 이데올로기와 실무 현장에서 광범위하게 도입되어 자본수지에 대한 체계적인 규제와 감독보다는 장단기 대외부채 조정이나 외환준비금을 대규모로 보유하는 수동적 안정화 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동성을 확대하여 투기적 외환 공격에 대비하여 외환위기 방지를 위한 자기보험 정책의 확대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이 보유하고 있는 외환준비금 규모도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70~80년대 GDP의 6~8퍼센트에 불과하던 외환준비금 비율이 2004년에는 GDP의 30퍼센트까지 늘어났다(Rodrick, 2006 : 255).
특히 시장 수익률과 미 국채 수익률의 차이를 기준으로 측정한 달러 축적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통상 GDP의 1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초과 외환준비금이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불태화 정책* 추진에 따른 거시경제 관리 비용, 자산시장 과열 등 금융 부문의 부정적 효과 또한 적지 않다.
이러한 막대한 사회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적정 외환준비금의 규모 또한 과거에는 3개월 수입액에 상응하는 규모에서 단기 대외부채 총량으로 확대되는 Guidotti 규칙이 통용되고 있다. 1년 이내 만기가 돌아오는 모든 대외부채의 원리금을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1년 동안 추가적인 대외차입 없이도 경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사전에 갖추고 있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러나 달러의 주기적 변동에 따른 중기 자본수지 사이클과 금융 패닉에 대비하여 대외부채 총량의 일정 비율을 예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갈수록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결국 외환준비금 비축에 따른 사회경제적 비용을 감안하면, 중상주의적 환율조작 추진을 위한 도구적 성격이라기보다는 외환위기와 그에 따른 거시경제 침체, IMF의 가혹한 차입 조건 등의 손실에 대비한 개별국가의 자기보험 성격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높다.
물론 최근의 금융위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외환준비금 축적 자체가 투기적 공격을 억제하고 주권국가의 통화 및 환율정책에서 자율적 영역을 확대하는 데 기여한 바는 크지 않다. 이 글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처럼 외환위기 방지는 자본 통제를 통해 자본수지를 적절히 관리할 때만이 가능하다. 연쇄적인 국가 부도 사태까지 몰린 97년 동아시아 국가들, 최근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등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까지 공통된 특징이 바로 급격한 외환 및 자본시장 자율화 정책에 있었음은 이를 확인해 준다. 급격한 외환 자율화 정책은 주권국가의 정책 자율 영역을 축소함으로써 위기에 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결국 워싱턴 컨센서스의 확대, IMF 보험 정책의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 외환준비금 비축 정책은 주기적인 금융위기와 IMF의 가혹한 정책처방 사이에서 개발도상국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이었던 셈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경우 IMF 차입과 동시에 실시된 각종 자본수지 규제 완화로 외국인의 포트폴리오 투자가 급증함으로써 발생한 자본수지 흑자가 외환준비금 축적에 기여했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는 역으로 금융위기가 발생할 경우 자본수지 적자가 곧 외환준비금 하락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결국 국내 위기 흡수 능력의 취약성을 노출시켜 환율하락에 따른 추가적인 위기 악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뜻한다.
한편, 개발도상국들의 보험정책(외환준비금 축적)은 두 가지 경로로 구성된다. 하나는 수출주도 성장정책을 통한 경상수지, 다른 하나는 외환 및 자본시장 개방과 규제완화를 통한 자본수지를 통해 달성된다.
전자는 달러 발행국인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의미하며, 후자는 개별 국가 입장에서 외환위기에 노출된 정도 및 규모가 갈수록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구성의 오류’를 통해 글로벌 불균형과 개발도상국의 금융위기 취약성은 꾸준히 누적되면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특히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국가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할 경우 그 위험성이 극대화 될 수밖에 없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미국경제의 내수침체는 수출주도 성장정책의 한계를 노출시키고, 이는 다시 미국경제의 침체로 이어진다. 또한 미국의 금융위기는 국제금융시장의 패닉을 유발하여 개발도상국의 외환 및 금융위기로 전염되고, 이는 또 다시 미국 및 선진국 금융시장의 위기로 확산된다. 물론 금융위기와 실물경제 침체 간의 누적적 위험 전이와 확산은 말할 것도 없기에, 현재 세계경제의 동반침체는 지금까지 취약한 글로벌 불균형의 위험성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다.
결국 현재의 글로벌 불안정과 불공평은 과거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이 부재한 은행체제의 불안정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국가만이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데 비해, 개발도상국들은 항시적 금융위기에 노출되어 자기보험 성격의 외환준비금 비축을 늘리고 있다. 전자는 글로벌 기축통화 체제의 근본을 개혁해야 함을 의미하고, 후자는 자본수지의 경기 순응적 성격을 제어하고 외환위기를 방지하기 위한 집단보험 제도를 도입해야 함을 의미한다.
* 불태화 정책 : 중앙은행이 외화를 매입하거나 매출한 결과 발생하는 본원통화의 증감을 상쇄하기 위해 공개시장조작을 통해 채권을 매각하거나 매입하려는 정책
여경훈 khyeo@saesay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