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또 다른 상처 월미도 미군폭격

2009. 9. 16. 20:35세상은


9월 15일 오후2시 월미공원 전통정원지구에서는 59주기(제3회) 월미도 미군 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다. 올해로 3회째 열리는 위령제,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주축으로 하는 인천상륙작전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월미도 미군 폭격은 무엇인고, 민간인 희생자는 무엇일까? 또 위령제를 왜 해마다 열고,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에서 계속해서 정부와 인천시에 요구 하는 것은 무엇일까?

월미도 미군 폭격은 한국전쟁 당시 수세에 몰렸던 연합군이 북한군을 상대로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과 맞물려 있다.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은 59년 전 오늘(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면적 0.66㎢ 규모의 섬 월미도를 사전 대책이나 경고도 없이 풀 한포기도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폭격한 사건이다.

당시 폭격으로 월미도에 거주하고 있던 민간인 100여명이 사망했고,  당시 미군은 수십 차례에 걸쳐 월미도 서쪽에 설치된 북한군의 대공포 등을 제거하기 위해 월미도에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이외에도 군사시설과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동쪽에도 네이팜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하였고, 기총사격을 가해 무수한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당시 미군은 미군 정보기관을 통해 또는 항공 정찰을 통해서도 이미 민간인 거주지임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무차별적으로 집중공경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월미도는 폐허로 변해버리게 되었고, 하루 아침에 민간인들은 아무 이유도 모른채 죽거나 터전을 잃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과 억울함에 대해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고, 진실은 외면 받아 왔다.  

▲ 불타는 월미도[왼쪽 사진, 1950. 9. 15.(Wolmido Island, 15 September 1950)]. 상륙 직후의 월미도[오른쪽 사진, 1950. 9. 15.(Afternoon, 9/15/50, Marines mop up Wolmi)] <출처ㆍ진실화해위원회>

살아남은 월미도 주민들이 자신들의 억울한 죽음과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평화와참여로가는 인천연대 등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중심이 돼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8년 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위의 모든 일들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한·미 정부가 공동조사를 벌여 이 피해에 책임을 지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사업을 지원하는 등 상징적 화해조처가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아무런 조처가 없었다.

현재 월미도 원주민들은 고령에 생존자들도 몇 되지 않는다. 이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원래 터전인 월미도에서 여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 달라는 것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권고한것 처럼 한·미 정부가 공동조사를 벌여 이 피해에 책임을 지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사업을 지원하는 등 상징적 화해조처를 원하는 것이다.

살아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 하지만 아직까지 정부와 인천시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4대강 사업에 예산을 쓰는것과 인천세계도시축전에 막대한 예산을 투여할 뿐이다. 오랜 세월 아픔을 간칙한채 살아온 월미도 원주민들의 고통은 보이지 않나보다.

한편, 활빈단 등 보수단체들은 14일 인천시 연수구 소재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자유공원 등지에서 ‘북핵 저지 한미동맹 강화와 친북좌익세력 척결’ 호국 행사를 진행했다.

활빈단은 “공산화의 운명을 맞았을 적화함락 위기상황에서 200여 척의 함정과 7만여 명의 병력이 상륙작전으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간 북한군의 배후 병참선을 끊고 전세를 역전시켜 서울 탈환과 압록강까지 진격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룬 맥아더 장군의 감투정신에 온 국민이 수은불망(受恩不忘)의 보은(報恩)을 실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보수단체들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거대한 성과만 보이고, 그로 인한 말도안되는 희생을 치뤄온 월미도 원주민들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 것같다.

월미도 미군폭격과 그로 인해 희생되어 아직까지 고통받고 있는 월미도 원주민들. 이는 분단의 또 다른 상처다.